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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s

집으로

by 40c 2009. 11. 7.












아주 어린시절. 그러니까 유치원도 다니기 전. 약 3살 무렵엔 자주 외가댁에 맡겨지곤 했다. 그 시기에는 아빠는 대학원을 다니셨고, 엄마는 학교 앞에서 당구장을 운영하신데다 동생까지 임신중이셔서 꽤나 손이 부족하셨다. 그래서 나는 종종 외가댁.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어린시절을 보내곤 했었다. 내리막길. 기와로 된 집. 연탄과 아궁이. 종종 찾아오던 부모님의 차. 판피린 물약. 장농. 짚으로 만든 김치저장고. 놀이터와 빨래터. 또래 아이들과의 숨바꼭질. 어떤 겨울엔 아궁이를 쑤셔대며 불놀이를 하다. 덥다며 눈이 내린 마당으로 뛰어가 눈밭위에 얼굴과 손을 묻고, 또 신나게 눈싸움을 하며 놀다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려 부엌으로 들어가 다시 아궁이 불에 손을 쬐곤 했었다. 보통의 기억은 겨울 또는 여름이었다. 그렇게 비료포대속에 짚을 잔뜩 넣고, 눈이 내린 산길을 걸어올라가 신나게 썰매를 타고 내려오면 발이 젖는줄도 몰랐다. 나는 아랫목에 몸을 녹이는 일도 좋아했고, 동네 할머니들로 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화투를 치는 일도 좋아했다. 아마, 네살 인생의 1/4은 그런 기억이었다.

함께 놀던 아이들은 어느날은 많았지만 어느날은 없었다. 어떤 일이건 다같이, 그리고 여럿이 해야 재밋는 일들은 혼자가 되면 흥미가 떨어진다. 그랬다. 아무도 없는 눈이 쌓인 산길을 오르다, 예전 같았음 저만치 오를 것을 절반만 올랐다 썰매를 타고 내려오고선 시시해져 버리기도 했었다. 언제나 놀이터는 동네였기에 같이 숨고 술래가 되서 잡던 그 아이는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서 근처를 서성이다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볼은 빨갛고, 콧물이 흘러 팔끝 소매에는 콧물을 훔쳐낸 자국이 있던 시골아이. 나는 일주일에 한번 할머니께서 가마솥에 덥힌 물로 알뜨랑 비누와 아기의 목욕타월로 씻겨주시는 것이 전부였다. 그조차도 해가 거듭될 수록 그 작은 대야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고, 그 무렵엔 나도 학원이며, 학교며 외가댁으로 가는 횟수가 줄었다.

여름에는 마루에 드러누워 있길 좋아했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얇은 이불을-이 이불은 겨울에 화투판으로 변한다-덮고서 처마 끝에 달렸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곤 했었고, 때때로 손을 뻗어 빗방울을 잡아 보기도 했었다. 톡톡-토독, 빗방울을 잡아보다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지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열어놓고 밖을 봤다. 집 앞 언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그리고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들곤 했었다.

실은 할머니께서 반나절에 오겠다고 말씀하시며 가리키시던 2시라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났다 싶으면 혼자 삐져서 이불속에 숨어버리곤 할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들어도 모른척 숨어있다가 몇번 나를 부르는 소리에 헤헤. 웃으며 꺄르륵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잘 울지도 않던 순한 아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혼자 있는 것에,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어느해 여름에는 가까운 해에 미국으로 이민간 큰외삼촌의 아들인 외사촌 오빠와 함께 지냈다. 어느날은 꺄르륵 장난도 쳤고, 어느날은 삐진 기억도 있는데 희미하다. 다만 모기장안에서 티비를 볼때쯤, 그땐 옆에 없었다. 아마 오빠는 큰외할아버지댁에 있는 또래의 사촌들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큰외가댁에는 외삼폰 내외와 큰외할머니, 그리고 외사촌오빠들이 셋 있었는데 맏이와 쌍둥이 형제였다. 실은 나와는 10년이라는 나이차이가 나서 어린시절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고 지냈었다.

명절에는 큰 외가댁에 많은 식구가 모였다. 가까이 사는 이유도 있었지만 거의 아들들이라 명절을 보내러 모였다. 그에 비해 나의 외가에는 2남 3녀의 가족이 있었는데, 외삼촌 한분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이모 두분은 서울에서 명절을 보냈고, 그나마 친가가 가까이에 있던 우리가족만이 외가로 가곤 했었다. 오히려 명절보다는 할머니의 생신이나 제사 때 외가의 가족들이 모두 모였고, 나도 또래의 사촌이 있구나, 하며 재밋게 놀았었다.

그래도 나는 그 속에서도 가끔은 혼자있기를 좋아했다. 아빠의 차로 몰래 들어가 열쇠를 꽂고, 테입의 음악을 듣기를 좋아했다. 혼자. 차 뒷좌석에 누워 하늘을 보며 공상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러다 하나 둘. 사촌들이 오면 다시 건넌방으로 도망쳐 나와 사촌들에게서 돈을 거둬서는 불꽃놀이를 위한 폭죽을 샀다. 처음엔 마당에서 그러고 놀다 어른들에게 혼나서는 집 밖의 길로 나가 열심히 불꽃놀이를 했다. 불꽃놀이가 시들해질때 쯤 우리는 정말 불을 피워서 놀았는데, 이것도 실은 홍수에 할머니댁이 사라진 전후 쯤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해의 일은 아니었다. 그 해를 전후로 몇년동안 걸친 일이었다. 무슨 삼재였던건지, 홍수로 할머니댁이 무너졌고, 사고와 병환으로 외숙모들과 나의 아빠가 돌아가셨다. 안다. 그 무렵, 엄마를 비롯한 외가댁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집도 곧 새로 지었고, 새로운 인연도 생겼지만, 이전의 추억이라거나 기억들이 쉽게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일이었다.

마지막, 할머니는 벼농사를 지으셨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할머니의 논으로 가서 손수 농사를 지으시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할머니는 어느 봄날에는 논에 농약을 뿌리셨고, 어느 여름날에는 막내사촌동생이 도랑에 발을 빠트려 근처 다른 할머니에게 손을 따기도 했었다. 가을에는 온 친척이 모여 추수를 돕곤 했었는데 짚이 세워져 있는 틈 사이를 뛰어다니며 우리는 숨바꼭질도 하고 놀았다.

뭐니뭐니해도 시골에서는 숨바꼭질이 재밋다. 부엌이나 큰방의 장농 뒤 그리고 장독대나 광 안으로 숨어들면 절대로 못찾는 경우도 있었다. 연탄을 잘못만져서 손이 새까맣게 변해도 그저 재밋게 놀았다. 그 중에는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와 담 아래에 숨어있던 아이도 있었는데, 패턴을 읽혀버려서 금새 잡히곤 했었다.

앞서 이야기 했던 명절날이 가까워 왔을땐 목욕탕을 갔었다. 그날은 할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갔던 날이다. 때를 벗기고 볼은 여전히 발그레 한 상태에서 근처 서점 혹은 문방구를 들렀었다. 거기서 한자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사서는 마루에 엎드려 삐뚤삐뚤 혼자서 할머니가 없는 반나절의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물론, 그 한자를 전부 떼진 못했지만.

그 후에 자주는 아니지만 할머니를 뵙곤 했었다. 우리집으로 오시거나 우리가족이 외가댁으로 가거나 해서 말이다. 매번 볼 때마다 할머니는 조금씩 작아지셨다. 어디서였더라, 어떤 영화에서 봤는데 우리가 커질 수록 할머니는 작아지신다고, 결국 할머니는 아이가 된다고 했었나. 정말 그런거 같다. 우리 할머니 정말 작아지셨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나서 난 정말로 효심이 가득한 사람은 아니지만, 눈시울도 붉어졌다. 핫. 할머니가 그리워져 버렸다. 잘 지내시려나.. 걱정도 된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휴무때는 할머니를 뵈러 갈까 해.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써내려간 글이다. 나의 어린시절 정말 20년 전 이야기. 해가 진 후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의 하늘을 보며, 써내려간 글이다. 근데 글 마무리가 안되..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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